Board 게시판

Notice 공지 Free 자유 Q&A 질문 Academia 학회 Visitor 방명록 Gallery 사진

2013-05-14 12대 만석꾼 경주 최씨

작성자 : 경주최씨

(2022-09-27)

조회수 : 1600

우리가 꼭 배워야 할 명문가의 정신 유산/12대 만석꾼 경주 최씨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12대 만석꾼, 9대 진사를 배출한 경주 최씨 집안. 가진 자로서의 책임을 철저히 실천한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가이다. 부자는 3대를 넘기기 힘들다는데 그 오랜 기간 만석꾼 살림과 명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세월의 풍상을 이겨 낸 빛나는 정신 유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훈처럼 내려오는 최 부잣집의 정신유산을 살펴보면, 첫째로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조선시대는 당쟁이 심한 사회였기에 벼슬이 높아질수록 당쟁에 휩쓸리기 쉬워 멸문지화를 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의 출세를 위해 불나방처럼 많은 이들이 달려들었지만 최씨 집안은 벼슬의 종착역이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둘째는 재산을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는 것이다. 돈이 돈을 벌어들여 갈수록 가진자와 못가진 자의 격차가 커지는데 최 부잣집은 부에 대한 욕망을 절제하고 가난한 자를 돌아봤다.
셋째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것이다. 많은 경우 100여 명이 넘는 과객들이 최 부잣집에 머물렀고 이들을 대접하는데 일년 수확량의 1/3이 사용됐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겠지만 최씨 집안은 각지에서 온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통해 지역 민심과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게 돼 무슨 일이 생기면 적절하게 대처할 수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이런 과객들을 통해 전국에 최 부잣집의 덕망이 퍼져나가게 돼 조선 말 화적들의 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흉년기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못하게 하여 가진 자의 도덕성과 지혜를 잘 드러내고 있다. 흉년기에 헐값에 나온 많은 논은 부자에게는 돈을 늘릴 절호의 기회다. 그러나 최씨 집안은 이를 가진 자의 비양심적인 행동으로 보았다. 무엇보다 헐값에 넘긴 자들의 원한을 사게 되어 나중에 그 원한이 부메랑처럼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야 했다. 조선시대에는 재산관리의 상당한 권한이 안주인에게 있었기 때문에 여자들의 절약정신이 집안을 좌우할 정도였다. 현재 최씨 집안의 7대 조모는 삼베 치마를 하도 여기저기 기워 입어서 옷을 물에 담그면 삼실이 불어나 솥에 꽉 찼을 정도였다.
이 외에도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은 다른 어느 나라 명문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최고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경주에서 사방 100리는 포항, 울산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지역이다. 이 넓은 지역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 최씨 집안은 한해 수확량의 1/3을 사용했다. 최씨 집안의 명문 비결은 한마디로 타인에게 후하고 자신에게는 박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진 자로서의 책임에 대한 원칙을 앞의 다섯 가지 덕목으로 가르쳤다면 자신을 다스리는 가훈인 육연(六然)을 통해서는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쳤다.
자처초연(自處超然):스스로에게 초연하고,
대인애연(對人靄然):남에게 온화하게 대하며
무사징연(無事澄然):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내며
유사감연(宥事敢然):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하고
득의담연(得意淡然):뜻을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고
실의태연(失意泰然):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하라
최씨 집안의 마지막 부자는 최준이다. 그는 백산상회를 설립해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에게 독립자금을 댔는데 이로 인해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만 했고 최씨 집안의 재산은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그리고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교와 계림학숙을 설립하는데 모두 희사됐다. 최씨 집안의 부는 철저하게 가진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며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