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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1 사람은 病이 아니라 命 때문에 죽는 거야

작성자 : 최인호

(2022-09-27)

조회수 : 1619

[매경이 만난 사람] 암투병중에 신작 낸 최인호 작가
"암이나 감기나 똑같아…사람은 병이 아니라 命 때문에 죽는 거야"
"한때 나를 퇴폐ㆍ상업주의라 비난했던 작가ㆍ출판사들…지금은 나보다 더 돈에 매달려"
기사입력 2011.07.08 16:23:34 | 최종수정 2011.07.08 19:25:41


2주 전쯤 기자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작가 최인호(66)였다. 암 투병 중인 그의 힘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 기자, 미안해 전화도 못 받고…이해하지?" 새 소설이 나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수차례 전화를 했던 터였다. 작가는 "매일경제를 통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는 그렇게 일주일간 대화와 이메일을 병행해가며 이루어졌다. 1963년 모 신문사 신춘문예에 `벽구멍으로`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이 투고된다. 신선하고 독특한 문학세계를 담은 이 작품은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신춘문예에 입선한다. 시상식 날 심사위원들은 깜짝 놀랐다. 교복 차림의 서울고 2학년생이 상을 받으러 왔기 때문이다. 최인호는 최연소 신춘문예 당선과 최연소 신문연재 소설가 등 `최연소`라는 기록을 비롯해 문단의 이색 기록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그는 소설책 표지에 얼굴이 실린 최초의 작가이자 작품이 가장 많이 영화로 만들어진 작가다.

세월이 흘러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작가 최인호는 암과 싸우고 있다. 2008년 5월 침샘암 발병 이후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으며 3년째 투병 중이다. 그는 투병 중에 손톱 발톱이 빠지는 고통과 싸우며 골무를 끼고 소설 한 편을 완성했다. 바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여백미디어)다.

 

-몸 상태는 어떤지.

▶투병 사실이 알려지면서 몸 상태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스티브 잡스처럼 유명한 사람도 아닌데 자꾸만 암 얘기를 하면 병을 팔아 앵벌이 하는 셈이 아닌가. 암이나 감기나 다 똑같은 병이다. 감히 병 따위가 사람을 죽일 수 없다. 사람은 병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명 때문에 죽는다.

-요즘도 매일 작업실에 나가는지.

▶나는 예전과 똑같은 일상생활을 계속한다. 작업실에도 나가고 산에도 간다. 운전을 하고 여행도 간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아픈데 무리하지 마세요"라는 말이다. 나는 스스로 환자 노릇을 하지 않는다. 나는 환자로서 죽지 않고 작가로서 죽을 것이다. 불경에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 하나 있다. "살 때는 온몸으로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온몸으로 죽어야 한다(生也全機現 死也全機現)"다. 나는 고통이 있다면 더욱 깊은 고통으로 들어갈 것이다.

-투병하면서 인생에 대한 사유가 달라졌을 것 같은데.

내가 암에게 고마운 점은 지난 60년간 살아오면서 느낀 것보다 지난 3년간 투병하며 깨달은 진리가 더욱 깊다는 것이다. 인생의 가치는 나의 의지와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의탁으로 가는 여정임을 깨달았다. 물론 나는 천주교 신자다. 처음에는 내 병을 고쳐주면 주님을 위해 글을 쓰겠다고 기도했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교묘한 흥정의 기도다. 나는 요즘 깨달았다. 내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기도는 성 프란체스코 살레시오의 말처럼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거절하지 말기를 구하는 기도"이다. 성 요한도 말했다. "모든 것을 얻으려면 아무것도 구하지 마라."

-책머리에 부인에게 바친 헌사가 눈길을 끌던데, 특별한 이유라도.

▶병을 통해 얻은 또 하나의 수확은 "나는 아내를 보았다(見)"는 것이다. 병은 내게 있어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한 공양미 삼백석과 같다. 나는 눈뜬 심봉사처럼 아내에게서 심청이의 진면목을 보았다. 나를 낳기 위해 내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수천 년이 걸린 것처럼 아내 역시 부모가 태어나기 전의 영원으로부터 온 거룩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이런 아내에게 내가 무엇을 바칠 수 있겠는가.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바로 내가 쓴 작품이다. 왜냐하면 나는 작가이므로.

-책 출간 후 많은 응원 메시지를 받았을 텐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최근에 이명박 대통령에게서 쾌유를 비는 난(蘭)과 친필로 쓴 카드를 받았다. 그 카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출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안부를 전합니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 여느 것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용기를 갖고 희망을 갖고 기적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념을 갖기 바랍니다. 5월 22일 이명박." 나로서는 뜻밖의 선물이었다. 그 복잡하고 바쁜 나랏일 중에도 잊지 않고 나의 쾌유를 비는 난과 친필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에 마음 깊이 고마움을 느꼈다.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나 후회스러운 작품이 있는지.

▶나는 피임을 하지 않는 탓으로 다산성 작가다. 물론 자식 중에서도 특별히 마음에 드는 자식이 있게 마련이다. 가령 초기의 단편들이나 `내 마음의 풍차` `지구인` 같은 현대소설과 역사소설을 처음으로 썼던 `잃어버린 왕국`, 나로서는 도저히 쓸 수 없었던 불가사의한 `길 없는 길`, 그리고 대하소설 `상도` 등 작가 인생에 있어서 마치 서울에서 부산을 갈 때 대전이나 대구 같은 중요한 중간 기착지 같은 작품들이 있지만,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이번에 쓴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다. 연재를 거치지 않고 두 달 만에 쓴 전작소설이며, 손톱과 발톱이 빠지는 고통의 축제 속에서 쓴 작품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 작품은 좋은 작품이다. 자기 작품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작가 이상도, 작가 이하도 없다.

-작가로서의 인생이 행복했나.

▶여덟 살 때부터 작가를 꿈꿔왔다. 나의 꿈은 오직 작가뿐이었다.

-`상업작가`라는 말을 들었던 시기가 잠시 있었는데, 그때 심정은.

▶1970년대에 이르러 우리나라는 산업사회에 접어들었다. 수출은 100억달러가 넘었으며, 자본주의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27세 때 쓴 `별들의 고향`은 온 사회를 뒤흔든 신드롬을 일으켰다. 나는 그때부터 이러한 현상이 사람들에게 곧 반대의 표적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튀어나온 못은 정을 맞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반체제 측으로부터는 상업주의라는 비난을 받았고, 체제 측으로부터는 퇴폐주의라는 양면의 협공을 받았다. 나는 선천적으로 비체제주의자다. 나는 문단을 떠나 영화로 갔다. 내가 10년 동안 영화에 몰두했던 것은 원래 영화를 좋아했지만 비가 올 때는 우산을 쓸 것이 아니라 비가 그칠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나를 비난하던 작가나 출판사 사람들이 나보다 더 맹렬하게 상업주의에 매달려 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혼자서 킬킬 웃는다.

-삶에서 가장 고마웠던 사람을 소개한다면.

▶내가 병에 걸렸을 때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은둔했던 것은 쓸데없는 호기심이나 관심을 받는 것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나처럼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이도 드물다고 생각할 정도로 엄청난 에너지를 느낀다. 삶에 있어 고마운 사람은 특히 가족이다. 그중에서도 내 아내 황정숙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바로 나 자신이므로.

-요즘 문단과 평단에 하고 싶은 말은 없는지.

▶얘기가 나온 김에 쓴소리 몇 마디 하겠다. 1954년 헤밍웨이는 노벨문학상 시상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단이 작가의 고독을 일시적으로 달래줄 수는 있으나 글을 쓰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작가가 고독을 버릴 때 그의 사회적 능력은 커질지 모르지만 그의 글은 퇴보하기 마련이다." 내가 보기에 요즘도 문단은 증권거래소 같고, 마치 조직폭력배의 논리와 같다. 치열한 먹이사슬이 있고, 권력과 세력 다툼의 구역이 있다.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가의 정신을 구속한다. 굳이 안톤 체호프가 말했던 "평론가는 쇠꼬리에 붙은 파리와 같다"라는 말을 되풀이하지 않더라도 작가는 스스로 고독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문단을 떠나야 한다.

-독자들에게 어떤 작가로 남길 원하나.

▶내 소설 `길 없는 길`의 주인공 경허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행방을 감추기 전에 이렇게 노래한다. "이름을 감출수록 더욱 이름이 새로워질까. 다만 이를 두려워하노라(但恐匿名名益新)." 내가 어떤 작가로 남기를 원하는 바는 없다. 중요한 건 내 문학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이다. 내 작품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은 나를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워할 것이다. 그러나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는 곧 잊힐 것이다.

-1970~1980년대 사회적 발언을 많이 안 했다. 이유는.

▶나는 문단에 데뷔했을 때부터 고민했다. 과연 내가 쓰는 펜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세상은 충고하는 사람이 없어서, 바른말 하는 사람이 없어서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아침에도 수많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 진심어린 충고와 바른말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부패하고, 여전히 억압하며, 여전히 폭력을 휘두르고, 여전히 상처를 입힌다. 차라리 나는 사회를 변화시키기보다는 스스로가 변화하는 편이 더 가치 있는 일이며, 그것이 결국 내 가족과 내 이웃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밑거름이 된다고 생각한다. 내 자신이 변화할 때 사회는 바뀐다.

-이번 작품이 최인호 문학인생의 총합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구상한 것은 작년 초여름이었다. 우연히 어떤 오락프로를 보다가 낯선 병명 하나를 발견했다. 즉시 관련 서적을 탐독했고, 오랜 노력 끝에 부모를 가짜라고 생각하는 `카프그라증후군`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이 이 구상의 시작이었다. 물론 지진이라든가, 에오니즘, 휴대폰을 잃어버리는 사건과 같은 작품에 중요한 테마는 그전부터 갖고 있던 소재였다. 이런 것들이 서로 합쳐져 구상이 되었다. 보통 한 30% 정도 구상이 되면 소설을 시작하는데, 이번 작품은 거의 90% 가까이 구상을 끝낸 후 집필을 시작한 작품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구상을 한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이 교묘하게 도와준 것 같다.

-작품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중국집 주방장과 작가는 자신이 만든 자장면과 작품에 대해 얘기하는 법이 아니다. 다만 내가 주의했던 것은 첫 번째로 투병 중에 썼기 때문에 고통의 흔적이 스미지 않았으면, 그 냄새가 소설에서 배지 않았으면 하는 문제였다. 두 번째로는 늘 전성기 때의 노래를 관록으로만 부르는 늙은 가수처럼 매너리즘에 빠져 소설을 만들고 교묘하게 제작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작가 오정희가 이렇게 작품을 평해왔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과감히 부수고 연극의 무대처럼 시간의 공간화를 시도하는 기법에서 작가의 젊은 문학정신과 패기를 보기도 할 것이다."

수천 개의 평론보다 나는 오정희의 평가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다. 왜냐하면 오정희는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눈 밝은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소설을 읽고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용기를 얻었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그가 소설을 쓰면 등에 업고서 함께 달마중을 갈 것이다.

-최인호에게 돈이란 무엇인지.

▶나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전업작가다. 나는 월급을 받아본 적이 없다. `별들의 고향` 연재를 마쳤을 때 이런 기사가 났다. "최인호, 강남에 호화주택 건립." 실은 비둘기집처럼 작은 집이었다. 결혼하겠다고 처가에 인사를 갔을 때 장모님은 내게 "도대체 어떻게 살 작정이냐"고 물었다. 내가 웃으며 "산 입에 거미줄 치겠습니까"했더니 장모님이 재떨이를 던지려고 하셨다. 작가 김영하가 내게 고백했던 적이 있다. 결혼하려고 했을 때 장모님이 `최인호를 보면 작가도 먹고살 수 있으니깐 허락한다`고 했다고 한다. 후배 작가 결혼에 도움이 됐다면 나는 선배 노릇을 제대로 한 것이다. 나는 프로작가다. 지금껏 원고료를 올리는 기중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맹세컨대 돈을 좇아 글을 써본 적은 없다.

-다음 작품은 구상하고 있는지.

▶이번에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지금까지 나는 작품은 내가 쓰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다. 작가는 받아쓰기하는 존재다. 그리하여 항상 깨어 받아쓰기할 준비를 하고 기다려야 한다. 마치 시인 TS 엘리엇이 노래했듯 "기다림 없이 기다려야"한다. 꽃은 자기 의지로 피는 것이 아니라 시절과 인연을 맞아 기다림 끝에 피어난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을 쓸 것인가 구상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그분이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 He is…

1945년 서울 중구에서 변호사 집안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서울고를 거쳐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서울고 2학년 재학 중이던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벽구멍으로`가 가작 입선했고,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1972년 `별들의 고향`이 100만부가 팔려 나가며 신드롬을 불러일으켰고 인기작가로 떠올랐다. 이후 `적도의 꽃` `고래사냥` `바보들의 행진` `깊고 푸른 밤` 등이 소설과 영화로 대성공을 거두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도시적 감수성에 기초한 감성혁명을 일으켰다는 찬사와 상업주의 작가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이후 `잃어버린 왕국` `길 없는 길` `왕도의 비밀` `상도` `해신`으로 이어지는 역사소설을 펴냈다. 이상문학상(1982), 아시아영화제 각본상(1986), 대종상 각본상(1986), 가톨릭문학상(1998)을 수상했다. 1987년 가톨릭에 귀의했다. 동갑내기 부인 황정숙 씨와 1남1녀를 두었다. 딸 최다혜 씨(39)는 출가해 중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아들 최성재 씨(37)는 삼성전자에 근무하고 있다. 외손녀와 친손녀가 1명씩 있다.

[허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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