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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7 [최승희 자서전] 불꽃

작성자 : 전윤호

(2022-09-27)

조회수 : 2999

《내가 조선 사람이라는 사실은 모든 일에 대해서 더욱 나를 조심스럽게 만듭니다. 고국을 대표할 만한 위인은 못 되지만, 어떻든 무용에는 나 하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동안 나는 잠자고 먹는 것도 잊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피투성이가 되어….》


식민지의 설움, 춤사위에 실어 사르다


최승희는 어린 시절 내게 수수께끼였다. 어딘가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가라고 나오지만 찾아보려고 하면 자료가 거의 없었다. 그 이유가 좌익인 남편과 함께 북으로 가서 활동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그의 삶은 정치적으로 불행했다. 남편과 함께 숙청돼 역사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승희는 정치가가 아니라 무용가였다. 우리는 그를 예술가로 기억한다. 예술가의 불행한 삶은 단지 그의 예술을 이해하는 데 참고 사항일 뿐이다.


이 나라가 식민지이던 어두운 시절에 무용이라는 예술로 세계에 이름을 떨친 이가 있다는 것은 희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민족은 춤과 노래를 즐기는 흥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는 아름다운 용모와 늘씬한 몸매로 무용을 하기에 적당한 몸을 타고났다고 한다.


자서전은 자료가 드문 최승희의 육필 원고와 그의 춤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평을 담고 있다. 최승희 자신의 이야기는 슬프다. 어린 시절 가세가 기울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학교에 다니던 일, 글 쓰는 오빠가 돈이 생기면 사오는 쌀로 끼니를 잇느라 먹을 것이 부족해 아침이면 부모와 아이들이 서로 먼저 밥을 먹지 않았던 일이 무거운 풍경으로 펼쳐져 있다. 그러나 춤을 배우기 위해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떠나는 모습에선 그의 배짱이 당당하게 전해온다.


시대의 암울함이 그에게 준 것은 무용에 대한 평에서도 보인다. 그가 일본에서 조선춤을 창작해 호평을 받을 때 일각에서 조선의 혼을 팔아먹는다는 비난도 받았던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세계적인 무용평론가 존 마틴은 그의 공연을 보고 “엄청난, 여성의 매력 그 자체”라고 평했다. 그는 “최승희, 그에게는 일본의 색, 중국의 몸짓과 한국의 선이 함께 흐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대를 뛰어넘는 것은 예술가의 숙명이다.


최승희는 와세다대 문학부 출신의 인텔리 안막과 결혼할 때의 심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결혼을 했다고 내가 변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결코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다. 오히려 무용에 대한 열정이 날이 갈수록 더해졌을 뿐이다.”


조선에서 무대에 서는 여자는 사내들의 장난감이 되어 무절제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결혼은 말없는 항의와도 같다고도 했다.





좋은 예술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나오는 법인지도 모른다. 최승희는 민족의 비극 속에서 민족의 춤을 춘 무용가다. 그런 그의 행적 때문에 우리가 이 희귀한 예술가를 잊는다는 것은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가치가 있다. 나는 그의 춤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글과 글의 행간에서 춤을 추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는 듯하다. 식민지의 설움이 키우고 남북의 분단이 삼켜 버린 무용가 최승희, 이 책의 제목 ‘불꽃’처럼 산 사람이다.


전 윤 호 시인